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크 왕국 (문단 편집) === 건국과 팽창 === [[파일:시크 궁정.jpg]] 라호르의 시크 궁정 (1855년 방문한 영국인이 그림) 결국 시크교도들은 후대 구루 고빈드 싱 시기부터 평범한 종교 집단에서 군사적 조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. 구루 고빈드 싱은 새로운 계율 체계를 시크교에 도입하였는데, 여기에는 할랄 고기를 먹는 대신 단 칼에 목을 베어 도축한 고기를 먹고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시행하며 항상 키르판이라는 칼을 소지하고 다닐 것을 포함하는 계율이 포함되어 있었다. 고빈드 싱이 지휘하는 시크교도들은 [[펀자브]] 및 [[카슈미르]]에서 힌두교도들의 지원을 받아 17세기 후반 무굴 제국 군대를 상대로 네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다. 그러던 1707년, [[아우랑제브]]가 죽고 그와는 성향이 매우 다른 아들 [[바하두르 샤 1세]][* 바하두르 샤 1세는 아버지였던 [[아우랑제브]]와는 정반대로 이전 황제들과 같은 관용정책의 노선을 걷는다. 하지만 노환 때문에 재위 5년만에 세상을 뜬다.]가 즉위해 이들을 무찌르면서 다시금 [[무굴 제국]]에게 굴복하고 만다. 그래도 바하두르 샤 1세는 전체적인 능력치가 상당히 뛰어난 황제였고, 관용정책을 베풀었기에 [[시크교|시크교도]]들은 이 시기에는 별 불만 없이 조용히 지낸다. 하지만 바하두르 샤가 사망한 뒤 [[무굴 제국]]이 다시금 혼란에 빠지면서 18세기 후반 그들은 란지트 싱을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군대 달 칼사[* 세례(암리트 산차르)받은 시크교도는 "싱(남, 사자)/카우르(여, 공주)"의 이름을 받고 "칼사(또는 할사)"라는 시크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. 이는 원래 "순결한 자"라는 의미의 펀자브어 단어로, 구루 고빈드 싱이 모든 세례받은 시크교도에게 준 이름이다. 칼사는 원래 어느 정도 군사적인 성격이 있는데, 칼사에 속한 자의 의무 중 하나는 약자와 억압받는 이를 지키기 위해 무기와 승마를 숙련하는 것이다. 달 칼사는 "칼사 군대"라는 뜻으로, 단순히 정치적인 성격의 시크교도 모임부터 진짜 군대까지 다양한 용법으로 쓰이는 단어이다. 그러나 단순히 배경설명 없이 "달 칼사"라고 하면 18세기 중반 활동한 시크교도 세력의 자원군(1747-1780)을 지칭하는 것으로, 펀자브에서 시크교도가 [[두라니 왕조]]와 86년에 걸쳐 벌인 전쟁(1751-1837)에서 초기(1751-1765) 시크교도의 주력군이었다.]라는 것을 조직하여 제국으로부터 저항하기 시작한다(1799). 걸출한 지도자 [[란지트 싱]]의 활약으로 시크교도들은 독립에 성공하게 되고 1801년 란지트 싱은 스스로 [[대왕]][* 이들의 언어로 마하라자]을 칭하고 시크 왕국을 개편해 나간다. 이후 란지트 싱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베테랑 출신 프랑스 장교들을 군사 교관으로 영입해 서구식 군대를 조직하는데 힘을 기울였고, 이 결과 서구식 친위대가 5,500명, 그 외 서구식 정규군이 약 60,000명에 이르렀다.[* 서구식 훈련을 거부한 전통 방식의 정규군 역시 약 50,000명에 달해 총병력은 약 12만 명 가까이 되었다.] 이 당시 수틀레지 강을 경계로 동인도 회사와 국경의 합의가 이루어졌기에, 인도 본토로의 진출이 저지된 대신 아프간, 카슈미르 방면으로 활발한 영토 확장을 추진했다. 이 와중에 청과 충돌하여 시킴 일대의 영토를 점령하였고, 네팔 구르카족과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